헌법·사법
초유의 대법관 재제청 요구…제청권과 임명권이 정면충돌했습니다
청와대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제청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의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새 후보 재제청을 요구했습니다. 현행 헌법 체제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충돌입니다. 대통령의 임명 거부 권한과 대법원장의 제청권 중 어느 쪽이 우선하는지를 두고 법률가들의 해석도 갈립니다.
서면 제청의 방식은 비판할 수 있지만, 그 비판이 대통령의 사실상 후보 지명권이나 다수당의 대법원장 탄핵 압박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대법원은 8월 18일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9월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 후임으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각각 제청했습니다. 청와대와 최종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면으로 제청한 방식이 논란이 됐습니다.
청와대는 8월 28일 김성수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은 국회에 제출하되 손봉기 후보자의 동의안은 제출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대법원장에게 후보추천위원회 결과를 존중해 다른 후보를 신속히 재제청하라고 요구했습니다.
1987년 현행 헌법 체제가 성립한 뒤 대통령이 대법원장이 제청한 후보를 국회에 보내지 않고 새 후보를 요구한 전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인사 이견이 아니라 헌법기관 사이의 권한 충돌로 기록될 가능성이 큽니다.
헌법은 권한을 어떻게 나누고 있습니까?
헌법 제104조 제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합니다. 대법원장은 후보를 제청하고, 국회는 동의 여부를 판단하며, 대통령은 임명합니다.
문제는 헌법이 대통령에게 제청을 거부하거나 반려하는 절차를 따로 적어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대통령이 제청된 후보를 반드시 임명동의 절차에 넘겨야 한다고 명시한 조항도 없습니다. 이 빈칸 때문에 대통령의 실질적 임명권과 대법원장의 독립적 제청권 가운데 어디까지 인정할지를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청와대는 왜 재제청을 요구했습니까?
청와대는 제청권이 임명권을 무력화할 수 없으며, 사전 협의 관행은 두 헌법기관의 권한을 함께 존중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했습니다. 재제청 요구는 제청권 제한이 아니라 상호 견제라고 주장했습니다.
- 1월 후보추천위원회 추천 뒤 7개월 넘게 제청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 대통령과 대법원장 사이의 실질적 협의 없이 서면으로 제청했다는 점
- 법원행정처가 기존 추천 후보들에게 추천 절차를 다시 진행할 가능성을 타진해 절차 신뢰를 훼손했다는 점
- 손 후보자가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는 점
대법원은 무엇을 설명해야 합니까?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후보추천위원회는 1월 21일 네 명을 추천했지만 조 대법원장은 8월 18일에야 후보를 제청했습니다. 여권은 이 기간을 209일로 계산하며 지연 사유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대법원은 공개 천거, 후보 정보 공개, 추천위원회 심사와 의견수렴을 거쳐 손봉기 후보자를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왜 장기간 결정을 미뤘는지, 청와대와 어떤 협의를 했고 어디에서 이견이 생겼는지, 추천 절차를 다시 검토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법부 독립은 설명하지 않을 권리가 아닙니다. 다만 설명 요구는 구체적 사실을 묻는 방식이어야 하며,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퇴나 탄핵을 먼저 위협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탄핵 압박과 대법관 증원이 왜 함께 거론됩니까?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과 지도부 인사들은 서면 제청과 국회 불출석 등을 비판하며 조 대법원장의 사퇴와 탄핵을 공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탄핵은 헌법이나 법률 위반이 있을 때 사용하는 최후 수단이지만, 현재 공개 발언 가운데에는 구체적 위반 조항보다 정치적 비난이 앞선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국회는 올해 2월 대법관 정원을 14명에서 26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여당 주도로 통과시켰습니다. 법은 2028년부터 3년간 매년 4명씩 늘리도록 했습니다. 재제청 요구, 대법원장 탄핵 압박, 대법관 증원을 각각 따로 볼 수도 있지만, 시민은 이 조치들이 현 권력의 사법부 영향력을 한꺼번에 키우는 결과를 낳는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지금 확정된 사실과 아직 판단인 것을 구분합니다
- 확정된 사실: 손봉기·김성수 두 후보가 제청됐고 청와대는 손 후보자의 동의안을 제출하지 않은 채 재제청을 요구했습니다.
- 확정된 사실: 민주당 인사들이 조 대법원장의 탄핵과 사퇴를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 확정된 사실: 대법관 정원을 26명으로 늘리는 법률이 통과·공포됐으며 2028년부터 증원이 시작됩니다.
- 법적 쟁점: 대통령에게 후보 임명을 거부할 재량이 있는지, 그 재량이 새 후보를 요구하는 권한까지 포함하는지는 견해가 갈립니다.
- 정치적 평가: 이 일련의 조치가 사법개혁인지 사법부 장악인지 여부는 제도 설계, 권한 행사 방식과 향후 인선 결과를 통해 판단해야 합니다.
시민이 지켜볼 점
- 조희대 대법원장이 재제청 요구를 수용하는지, 기존 후보군과 새 추천위 중 어떤 절차를 택하는가
- 청와대와 대법원이 협의 경위와 후보 평가 기준을 시민에게 어느 범위까지 공개하는가
- 여권이 탄핵 사유로 주장하는 구체적 헌법·법률 위반 행위를 제시하는가
- 대법관 증원과 후속 인선이 사건 적체 해소보다 특정 권력의 최고법원 재편으로 작동하지 않는가
씨드의 관점
씨드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제청 방식과 장기 지연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습니다. 헌법기관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 이유를 시민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설명 책임과 사법부의 복종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대통령이 후보를 사실상 다시 고르고 다수당이 탄핵을 압박하는 방식이 관행으로 굳으면, 제청권은 껍데기만 남을 수 있습니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한 다수권력일수록 사법부 앞에서 더 절제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선거 승자가 모든 권력을 갖는 체제가 아니라, 선거 승자도 넘지 못할 선을 헌법으로 정한 체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