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드칼럼

국가가 강해질수록 사회도 강해져야 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실패를 ‘사회주의’라는 한 단어로 단순화하지 않고, 석유 의존과 권력 집중, 정책 오류를 고칠 제도와 시민사회의 약화라는 구조 속에서 살펴봅니다.

베네수엘라를 보며 한국을 생각하는 이유

저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가 망한 나라’라는 한 문장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시민운동과 공익의 현장을 오가며 일해 왔습니다. 환경운동의 현장에 있었고, 꿈에품에를 만들며 기업의 사회공헌과 지역아동센터 같은 생활 현장을 연결하는 일도 해봤습니다. 공공기관과 지방정부의 행정도 가까이에서 보았고, 진보와 보수 시민사회 양쪽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대화해 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좋은 뜻만으로 공익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했습니다.

저는 국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는 유능해야 하고 법치와 안전,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본적 안전망을 제대로 책임져야 한다고 봅니다. 시장도 자유롭게 움직이되 공정한 규칙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다만 국가가 선의를 이유로 사회를 대신하고 시장을 직접 움직이며 시민의 판단까지 대신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유를 지키는 핵심은 국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제한하면서도 유능하게 만들고, 동시에 국가를 붙잡아 줄 사회의 힘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한국을 베네수엘라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은 산업구조도 다르고 제도적 기반도 훨씬 튼튼합니다. 그러나 ‘정책이 틀렸을 때 누가 그것을 고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남습니다. 제가 씨드시민파트너스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 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만드는 사회가 아니라,
  • 시민이 국가가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드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먼저 버려야 할 두 가지 단순화

‘복지를 많이 해서 망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차베스 초기의 보건·교육 확대와 빈곤 완화에는 실제로 일정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복지 자체보다 그것을 어떤 생산 기반과 재정 구조 위에 올려놓았느냐입니다. 베네수엘라는 국가재정과 외화수입을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고유가 시기의 막대한 수입을 경제 다변화와 생산성 향상, 국영기업의 경쟁력 강화로 충분히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제재 때문에 모두 무너졌다’는 설명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2017년 금융 제재와 2019년 PDVSA 제재는 자금 조달과 석유 수출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석유 생산 감소와 재정 불안, 가격 왜곡과 물자 부족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재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제재 하나로 모든 실패를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이미 취약해진 제도와 정책 위에 외부 충격이 들어왔고, 그 충격을 견딜 힘이 없었던 것이 더 정확한 설명입니다.

몰락은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문제를 1998년 차베스 당선부터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전부터 석유 의존과 부패, 재정 불안,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이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차베스는 아무 문제 없는 나라를 갑자기 망가뜨린 인물이 아니라 이미 흔들리던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타고 등장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의 불만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시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차베스 정부는 석유수입을 기반으로 보건·교육·주거·보조금 프로그램을 확대했습니다. 초기에는 빈곤층의 삶이 개선됐지만 성공 경험이 반복되면서 ‘국가가 직접 해결하면 된다’는 방식도 강화됐습니다. 시민과 지역사회, 기업과 전문가 집단이 스스로 해결하는 공간보다 대통령과 정부가 배분하고 결정하는 공간이 넓어졌습니다.

2002~2003년 석유공사 PDVSA 파업 이후 대규모 인력이 해고됐고, 숙련된 기술자와 경영 인력이 빠져나갔습니다. PDVSA는 전문성과 수익성을 중시하는 석유기업보다 정부의 재정과 사회정책을 떠받치는 기관으로 변해 갔습니다. 국영기업이 공익을 위해 존재할 수는 있지만 전문성이 정치적 충성보다 뒤로 밀리면 결국 공익을 수행할 능력까지 약해집니다.

정책 실패보다 더 위험한 오류 수정 능력의 붕괴

정부는 생활비를 낮추기 위해 생필품 가격을 통제했고 외환도 국가가 배분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민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산비보다 낮은 가격은 기업의 생산을 위축시켰습니다. 공식환율과 실제 환율이 크게 벌어지자 값싼 달러를 배정받는 일이 특권이 되었고 경제는 생산 경쟁보다 권력과의 거리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고유가는 이런 구조적 문제를 오랫동안 가렸습니다. 돈이 들어올 때는 잘못된 정책의 실패가 바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가 왔을 때 버틸 생산 기반과 재정 규율, 전문 관료제와 독립적인 제도가 준비되어 있었는지가 진짜 실력입니다.

국유화와 계약 변경이 확대되고 정치권력의 영향이 사법·의회·언론으로 넓어지면서 정책 오류를 수정할 장치도 약해졌습니다. 어느 정부나 잘못된 정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회와 법원, 언론, 기업,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살아 있으면 잘못된 정책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정책 실패와 함께 정책을 고칠 사회적·제도적 능력까지 약화됐습니다.

  • 가장 치명적인 실패는 잘못된 정책 그 자체만이 아니라,
  • 그 정책을 고칠 수 있는 사회의 힘이 사라진 것입니다.

제가 가장 두렵게 보는 것은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저는 중도보수의 입장에서 자유시장과 재산권, 법치와 책임 있는 재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격통제와 국유화, 통화 남발을 분명히 비판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니까 망했다’는 말로 끝내면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놓칩니다. 어떤 이름의 정부든 국가가 자원과 정보와 권한을 독점하고 시민과 기업을 국가의 허가와 배분에 의존하게 만들며, 사법·언론·의회가 이를 바로잡지 못하게 하면 비슷한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파 권위주의도 사회를 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경험한 시민사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진보 시민사회는 공익의 언어와 의제, 조직과 활동가를 축적했지만 국가사업과 보조금, 정당정치와 가까워질수록 국가정책의 수행기관처럼 움직일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 시민사회는 자유와 법치를 강조하면서도 시민의 일상 문제를 꾸준히 조사하고 해결하는 조직보다 정당정치와 명망가, 선거와 광장 동원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민이 사라지는 순간 시민운동은 약해집니다.

《좁은 회랑》으로 보면 실패가 더 선명해집니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좁은 회랑》에서 자유가 국가의 부재에서 생기는 것도, 강력한 국가 하나만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국가는 법과 질서를 집행할 만큼 강해야 하고 사회는 그 국가를 통제할 만큼 강해야 합니다. 두 힘이 서로 밀고 당기며 함께 성장하는 좁은 공간에서 자유가 유지됩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국가가 석유자원을 장악하고 분배하는 힘은 커졌지만 그 국가를 붙잡을 사회의 힘은 함께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국영기업의 전문성, 기업의 자율성, 언론과 의회의 견제, 독립적인 전문가 집단의 목소리가 약해지면서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브레이크를 밟을 사람이 줄었습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력은 강해졌지만 국가가 실제로 일을 해내는 능력은 오히려 약해졌습니다. 석유 생산과 공공서비스는 흔들리고 통화가치는 무너졌습니다. 권력이 집중된 국가는 겉으로 강해 보일 수 있지만 사회의 견제와 전문성이 사라지면 행정능력도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계속 관찰해야 할 다섯 가지

한국이 베네수엘라로 가고 있다는 식의 공포 프레임은 신중해야 합니다. 특정 복지정책이나 세금 하나를 두고 ‘이러다 베네수엘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시원할지 몰라도 분석적으로 약합니다. 중도보수 시민사회가 신뢰를 얻으려면 공포를 과장하기보다 실제 위험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제가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정책의 좌우보다 오류 수정 장치가 살아 있는가입니다.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계산하는가, 재산권과 계약의 예측 가능성이 지켜지는가,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전문성이 정치에 밀리지 않는가, 의회·사법부·언론·감사기관이 정권이 아니라 제도의 편에 설 수 있는가, 시민단체가 정부 보조금이나 정당의 동원체계 없이 정보·재원·사람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가를 계속 물어야 합니다.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의 과제, 시민화

한국의 산업화는 국가와 시장의 능력을 크게 키웠고 민주화는 국가권력을 선거와 헌법, 제도 안에 묶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가 충분히 자립했는지는 별도의 질문입니다. 국가 예산과 정당의 프레임, 기업의 후원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시민의 문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조사하고 해결하는 힘은 더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의 과제로 ‘시민화’를 말합니다.

시민화는 국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운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민이 데이터를 보고 예산을 읽고 공공기관을 평가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지역 문제의 대안을 직접 제안하는 과정입니다. 국가에 해달라고 요청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시민이 먼저 조사하고 실험하고 기록한 뒤 국가와 시장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씨드시민파트너스는 정당의 주장을 대신 전달하거나 선거 때 사람을 모으는 조직이 아니라 자유와 책임, 법치와 시장의 활력, 자발적 공동체라는 가치를 시민의 생활 언어로 번역하는 기능조직이어야 합니다. 시작은 시민감시와 시민브리핑입니다. 사실을 먼저 확인하고 시민이 알아야 할 내용을 쉬운 언어로 정리하며, 문제가 있으면 비판하고 좋은 정책은 어느 정부의 것이든 인정하는 태도로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 국가와 싸우기 위해 시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 국가와 시장이 제대로 일하도록 시민의 힘을 키웁니다.

좋은 국가는 강한 사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 시작하면 시민은 편해질 수 있지만 사회는 약해질 수 있습니다. 사회가 약해지면 국가의 실수를 고칠 힘도 사라집니다. 더 많은 문제가 다시 국가로 몰리고 국가는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합니다. 결국 권력은 커지지만 국가의 실제 능력은 약해지는 역설이 생깁니다.

좋은 국가는 시민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좋은 시장도 시민의 감시를 부담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좋은 시민사회 역시 국가와 기업을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필요로 하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대신하지 않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시민운동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만 묻지 않아야 합니다. 시민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스스로 할 수 있는지, 국가와 시장을 어떻게 더 잘 움직이게 할 것인지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베네수엘라 국가 실패의 반대편에는 거대한 영웅이나 완벽한 정부가 아니라, 국가가 한 걸음 커질 때 함께 한 걸음 커지는 시민이 있습니다. 저는 그 시민의 힘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