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드칼럼

함석헌을 다시 생각한다

민주화의 제도를 넘어 시민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사회의 주체로 자라는 길을 함석헌의 ‘한 사람’과 씨알의 질문에서 다시 찾습니다.

민주화 이후, 다시 시민을 묻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한민국 현대사를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개의 거대한 성취로 설명해왔습니다. 산업화는 가난을 극복하고 삶의 물질적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민주화는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이 자신의 대표자를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확대했습니다. 두 성취 모두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선거가 정례화되고 정권교체가 가능해졌으며 표현과 결사의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을 국민의 손으로 선출합니다. 제도의 차원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점점 더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정치는 진영으로 갈라지고, 선거에서 이긴 다수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를 얻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선거에서 진 쪽은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거나 거리로 나옵니다. 정치적 갈등이 커질수록 시민은 정치의 주인이 되기보다 어느 한 진영의 지지자로 동원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제도는 만들었지만, 그 제도를 살아 움직이게 할 시민의 자리는 충분히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저는 다시 함석헌을 생각합니다.

  •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우리는 과연 충분히 시민이 되었는가.

함석헌, 그리고 ‘한 사람’

함석헌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그를 민주화운동이나 진보적 시민사상의 계보 안에서 읽어왔습니다. 그것은 분명 함석헌의 중요한 한 면입니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운동가이기 전에 종교와 역사, 생명과 문명, 인간과 세계를 함께 고민했던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사상을 오늘의 어느 정치적 진영에 그대로 넣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함석헌을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거대한 사유 가운데 오늘 우리가 다시 주목해볼 작은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한 사람’입니다.

함석헌은 1971년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민(民)은 원래 그저 사람인데, 봉건시대에는 신민, 민족주의 시대에는 국민, 공산주의에서는 인민, 민주주의에서는 민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정치적 이름이 싫어서 ‘아무 것도 부칠 수 없는 씨알’이라는 말을 쓴다고 했습니다.

이 문장은 오늘 다시 읽어도 강렬합니다. 진보이기 전에 사람이고, 보수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국민이기 전에 사람이고, 어떤 정당의 지지자이기 전에 한 사람입니다.

함석헌이 말한 씨알을 이 한 문장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씨알에는 종교적이고 생명적인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일도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새롭게 정의하거나 계승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큰 생각의 한 귀퉁이에서 오늘의 ‘시민’을 다시 생각할 단초를 발견해보려는 것입니다.

  • 사람에게 국가를 붙이면 국민이 됩니다.
  • 계급을 붙이면 인민이 될 수 있습니다.
  • 운동의 이름을 붙이면 민중이 됩니다.
  • 그러나 그 모든 이름보다 먼저 사람이 있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출발선이다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시작합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없이 민주주의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보수진영의 일부가 선거제도의 공정성 문제에 강한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부정선거 주장은 당연히 증거와 법적 절차를 통해 검증되어야 하지만, 선거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기반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자신의 대표자를 선출합니다. 그러나 대표자를 뽑았다고 주권 자체를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맡긴 것은 일정한 권력이지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자리까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에서는 선거에서 이긴 다수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쉽게 나타납니다. 다수당이면 법을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민 전체의 뜻을 자신이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민주주의는 결국 ‘머릿수가 힘인 정치’로 퇴행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는 다수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에는 다수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법이 있고, 법치가 있고, 권력분립이 있고, 소수자의 자유가 있습니다. 다수가 선택한 정부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민주화는 누가 권력을 갖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 상당한 답을 주었습니다. 이제 선거 이후 시민은 어떻게 계속 주권자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세 번째 질문까지 가야 합니다.

  • 누가 권력을 갖는가.
  • 그 권력은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는가.
  • 선거 이후 시민은 어떻게 계속 주권자로 살아갈 것인가.

씨알의 정치적 주체화

함석헌을 연구한 이상록은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함석헌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가 생각한 민주주의는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의 일반적인 ‘민주수호’나 ‘민주회복’의 논리와 완전히 같지 않았다고 봅니다. 당시 자유민주주의 담론이 주로 대의민주주의의 정상화에 관심을 가졌다면, 함석헌은 자유민주주의를 ‘씨알의 정치적 주체화’라는 차원에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제도를 민주화하는 것과 사람이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선거제도가 있다고 시민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민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편이 집권했을 때에도 권력을 감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수가 결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양심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정보를 요구하고, 다른 사람과 결사하고, 필요하다면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고 나서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민주주의를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 씨알의 정치적 주체화.

진보의 질문과 자유민주주의의 질문이 만나는 곳

최근 한 연구논문을 읽으면서 저는 흥미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 논문은 2016~2017년 촛불집회를 명백히 진보적인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대목에 이르자 저의 자유민주주의적 문제의식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국회의원·시장·도지사·교육감 같은 ‘대리자’들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이용해 시민의 의사와 이해를 배반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시민의 문제제기를 대의제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로 해석합니다.

저는 촛불집회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그 연구자의 해석 전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동의합니다. 선출된 권력은 시민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시민은 선거 이후에도 계속 권력을 감시해야 합니다.

그 순간 저는 한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진보적 관점에서 함석헌을 읽은 연구자의 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고민해온 제가 같은 문제를 발견했을까요. 어쩌면 그 질문이 진보의 질문이기 전에 시민의 질문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함석헌의 씨알은 진영을 넘어섭니다.

  • 선출된 권력이 시민을 배반할 수 있는가.

진보에는 자유를, 보수에는 시민을 묻다

오늘의 진보 시민사회에도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 진보 시민사회는 참여, 권리, 인권, 평등, 연대라는 중요한 가치를 발전시켜왔습니다. 민주시민교육을 제도화하고 국가와 지방정부의 의사결정에 시민이 더 많이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도 만들어왔습니다. 그 성과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물어야 합니다. 시민을 국가의 의사결정에 더 많이 참여시키는 것과 시민사회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같은 일입니까.

시민참여를 제도화하려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것은 아닌가. 국가가 민주시민을 교육하고, 시민참여를 설계하고, 시민단체를 지원하고, 시민의 공공활동을 제도 안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정작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약해진 것은 아닌가. 시민의 힘을 키우기 위해 시작한 일이 국가의 역할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면 그것 역시 성찰해야 합니다.

반대로 보수 시민사회에도 질문해야 합니다. 선거의 공정성을 지키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가. 선거부정 의혹에 모든 시민적 에너지를 집중한 채 선거 이후 권력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 사회의 문제를 시민 스스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민주주의의 입구에서 멈추는 것 아닐까요.

진보에는 다시 자유를 묻고, 보수에는 다시 시민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보다 더 깊은 곳에서 다시 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시민을 ‘씨앗’으로 바라보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시민화라는 말을 사용해보고자 합니다. 시민화는 함석헌의 말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의 시민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제한적인 사회학적 개념입니다.

저는 기존의 ‘시민’이라는 말이 때로 지나치게 정적으로 이해된다고 느낍니다. 시민은 이미 시민권과 권리를 가진 하나의 완결된 존재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실제의 시민은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유를 사용하는 법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인정하는 법을 배웁니다. 자신의 권리뿐 아니라 책임을 배우고,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하고, 실패하고, 다시 생각하면서 조금씩 시민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시민을 씨앗에 비유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씨앗’이라는 말 역시 함석헌의 ‘씨알’을 대신하거나 넘어가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씨알은 훨씬 크고 깊은 사상적 개념입니다. 씨앗은 그 가운데 제가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시민이라는 한 부분을 현대적으로,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든 작은 사회학적 은유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씨앗 같은 시민이 계속 성장해가는 과정을 시민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씨앗은 이미 생명을 품고 있지만 완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 자랍니다.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더 나은 시민성을 향해 계속 변화합니다.

민주화 이후, 시민화

민주화가 우리에게 정치적 권리와 제도를 가져다주었다면, 시민화는 그 자유와 권리를 실제로 사용할 사람을 세우는 과정입니다.

민주화는 선거제도를 바꾸었습니다. 시민화는 선거 이후에도 시민이 주권자로 살아가는 힘을 키웁니다. 민주화가 국가권력을 시민의 통제 아래 놓는 제도를 만들었다면, 시민화는 그 제도를 실제로 움직일 시민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시민화는 민주화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민주화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과제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함석헌의 씨알이 바로 시민화를 의미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큰 사상을 오늘의 작은 개념 안에 집어넣을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함석헌이 평생 붙들었던 한 사람의 문제, 권력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어떤 정치적 이름으로도 완전히 규정될 수 없는 사람을 다시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민주화 이후 잊어버린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국가도 있고 시장도 있습니다. 정당도 있고 시민단체도 있습니다. 수많은 선거와 제도와 위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시민은 얼마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연결하고, 스스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습니까.

민주화 이후 우리가 다시 함석헌을 생각해야 할 이유를 저는 바로 여기에서 찾고 싶습니다. 함석헌에게서 답을 가져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남긴 큰 질문 앞에서 다시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민주주의가 제도가 되는 것을 넘어 삶이 되고, 국민이 유권자가 되는 것을 넘어 시민이 되고, 시민이 권리를 가진 존재를 넘어 자유와 책임을 가지고 스스로 자라나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음 시대에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산업화가 사람에게 살아갈 물질적 기반을 만들고,
  • 민주화가 사람에게 정치적 자유를 돌려주었다면,
  • 시민화는 그 자유를 사용하여 사회의 주체로 살아갈 힘을 키우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