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소리

기업을 정부의 현금인출기로 보지 마라

정부와 한전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 약 25조 원을 미리 내는 방안을 제안했다. 공기업 부실의 책임을 기업 현금으로 메우고 전기요금으로 기업의 입지를 조종하려는 발상이 왜 국가 강압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묻는다.

5년치 전기료를 먼저 내라는 정부

정부와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2027년부터 2031년까지 낼 전기요금 약 25조 원을 미리 내는 방안을 제안했다. 삼성전자 20조 원, SK하이닉스 5조 원 규모다. 한전은 이 돈으로 용인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송전망과 변전소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기업이 사용한 전기의 대가를 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력망 건설비를 사실상 선대출해 달라는 이야기다.

아직 법적 강제나 확정된 계약은 아니다. 기업에는 국채 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지급하고 선납금은 향후 전기요금에서 차감한다는 조건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를 평범한 금융거래나 기업의 자발적인 투자로만 포장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한전은 사실상 독점적인 전력공급자다. 반도체 공장은 안정적인 전력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 전력망 연결 시기와 공급 안정성을 쥔 공기업이 정부와 협의해 핵심 고객에게 25조 원을 먼저 달라고 요구한다면, 기업이 과연 아무런 부담 없이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자발성이라는 얇은 포장지를 두른 현금 동원에 가깝다.

  • 전기는 거래 조건이기 전에 기업의 생명선이다.
  • 생명선을 쥔 쪽의 25조 원 요구를 대등한 협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한전 부실의 채권자 이름만 바꾸는가

한전의 부채는 2026년 6월 말 기준 약 210조7000억 원이고 하루 이자 비용만 약 115억 원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채권 발행 한도의 특례도 2027년 말 종료될 예정이다. 결국 이번 방안은 한전의 부채와 자금조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대 기업의 현금을 끌어오는 우회로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전기료를 미리 받는다고 한전의 부채가 마법처럼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선납금은 앞으로 전기를 공급하거나 돌려줘야 하는 회계상 부채가 될 수 있고 기업에 이자도 지급해야 한다. 한전채 대신 기업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에 가깝다. 공기업의 구조개혁이 아니라 채권자의 이름만 바꾸는 회계적 돌려막기라면 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전력망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핵심 기반시설이다. 필요한 비용은 한전의 자구책, 투명한 요금체계, 정부 예산과 국회의 감시 아래 조달해야 한다. 특정 기업을 불러 수십조 원의 미래 요금을 내놓으라고 할 일이 아니다.

미래를 끊임없이 당겨 쓰는 정치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대선 과정에서 국가부채를 늘리는 것은 미래 국가가 사용할 재원을 당겨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2026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는 초과 세수로 국채를 상환하는 것을 두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까지 했다. 세입이 예상보다 늘었어도 빚을 갚기보다 미래 성장 분야에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발언과 이번 전기료 선납 구상을 나란히 놓으면 이 정부의 위험한 사고방식이 선명해진다. 국가부채는 미래 재정을 당겨 쓰고, 초과 세수는 채무 상환보다 추가 지출에 쓰고, 이제는 기업이 앞으로 낼 전기료까지 당겨 쓰겠다는 것이다. 미래는 정부가 필요할 때마다 열어 보는 무한정한 금고가 아니다.

물가 상승과 명목성장으로 국가부채의 실질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논리 자체는 결코 공짜 해법이 아니다.

정부 부채의 실질가치가 줄어드는 동안 국민의 월급과 예금, 연금과 구매력도 함께 녹아내린다. 물가가 오르면 금리가 상승하고 새로 발행하는 국채의 이자 부담도 커질 수 있다. 국가가 갚아야 할 값을 국민의 생활비와 화폐가치 하락으로 떠넘기는 일을 재정전략처럼 포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책임한 망발이다.

전기요금으로 기업의 입지를 조종하려는 발상

문제는 25조 원만이 아니다. 정부는 지역별 전기요금제를 통해 전력이 풍부한 지역으로 기업과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수도권보다 비수도권의 산업용 전기요금을 낮춰 기업의 입지 선택에 영향을 주겠다는 것이다.

균형발전은 필요하다.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가 지나치게 멀어 생기는 송전비용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정책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모든 수단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요금과 인허가, 전력망 공급을 한 손에 쥔 정부가 자신이 원하는 지역으로 기업을 유도하면 경제적 유인은 쉽게 경제적 압박으로 변한다.

형식적으로 선택권을 남겨놓았다고 강압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만든 비용 격차가 지나치게 커지고, 수도권 투자를 선택한 기업이 전력 연결이나 행정절차에서 불이익을 걱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입지 선택이 아니다.

기업은 국토 배치도의 말이 아니다

이 대통령은 기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당장 뒤집을 수는 없다면서 기업은 돈이 되는 곳으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 말 자체는 맞다. 기업은 수익성, 인력, 공급망, 물류, 시장 접근성, 용수와 전력 안정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입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지방을 기업이 스스로 선택할 만큼 경쟁력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학과 전문인력을 키우고 교통과 주거를 개선하며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와 신속한 행정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 경쟁 없이 전기요금과 행정권으로 기업의 팔을 비틀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 공장 하나에는 수많은 협력업체와 연구인력, 학교와 연구시설, 교통과 주거가 함께 따라붙는다. 정부가 정치적 구호에 취해 공장을 말판처럼 옮기려 들면 주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체의 효율성이 무너진다.

  • 균형발전은 기업을 끌고 가는 명령이 아니다.
  • 기업이 스스로 찾아가도록 지방의 경쟁력을 만드는 일이다.

거절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것을 법으로 증명하라

정말 자발적인 선납이라면 정부와 한전이 먼저 증명해야 한다. 선납을 거절한 기업이 전력망 연결, 공급계약, 인허가와 정책지원에서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문서와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

선납금의 사용처를 별도 관리하고 전력망 건설이 지연되거나 무산될 경우 즉시 환급하는 조건도 공개해야 한다. 이자 산정, 회계처리, 한전의 상환 능력, 특정 대기업에 대한 특혜 가능성까지 국회와 국민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런 안전장치도 없이 ‘서로 이익이 되는 거래’라는 말만 반복한다면 믿을 수 없다. 독점 공기업이 전력 공급을 쥐고 정부와 함께 25조 원을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평범한 거래의 경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전기는 기업을 길들이는 목줄이 아니다

기업은 정부의 현금인출기가 아니다. 전기는 기업을 길들이는 목줄이 아니다. 미래 세대는 현 정부의 과소비를 대신 결제할 신용카드가 아니다.

재정의 구멍을 미래로 넘기고, 공기업의 부실을 기업에 떠넘기고, 전기요금으로 기업의 입지를 조종하려는 정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정부는 기업의 미래 전기료에 손을 뻗기 전에 한전의 부채가 왜 210조 원을 넘었는지부터 책임져야 한다. 지방으로 기업을 몰아붙이기 전에 지방이 기업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을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이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산업정책은 국가 강압으로 변한다. 지금 정부가 바로 그 선 앞에 서 있다.

  • 기업은 정부의 현금인출기가 아니다.
  • 전기는 기업을 길들이는 목줄이 아니다.